더 라비린스에는 처음으로 쓰는 글이군요. TRE 시리즈 (The Riddle Everlasting, The Regret Everlasting) 메인 제작자 이충명입니다. 안녕하세요.
사실 더 라비린스에는 그동안 가입 안 하고 있다가, 이번에 KAIST Puple 동아리 일원으로서 선물 제작 후 반응이 궁금해서 가입했습니다. 보니까 외부미궁은 얼마 없네요. 더 라비린스가 많은 미궁 제작층을 흡수한 모양입니다. 좋네요.
잠깐 TRE 얘기를 좀 해보죠.
TRE1이 나온 2013년은 고전적인 방식의 미궁이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왜, '정답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로 시작하는 미궁들 있잖아요? 당시에는 드래그로 숨겨진 글자를 찾는다든지, 탭 이름이나 그림파일의 제목에 단서가 숨어 있고, 그림을 가져다가 그림판에서 페인트 툴로 색칠을 해 보면 옅은 색의 글자가 나오는 그런 게 유행이었을 때였습니다. view-source: 가 치트키인 때였죠. 아마 오프라인 방탈출카페라는 문화도 없었을 겁니다.
당시 TRE1을 개발하게 된 이유는 미궁들에 항상 보던 트릭만 나오고 점점 고여가는 느낌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림파일 이름에 단서를 숨겨 놓으면 미궁을 처음 풀어보는 사람들은 굉장히 어렵겠지만 숙련자는 당연하다는 듯 찾고 넘어가겠죠. 저는 이게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본 미궁들과 방향성이 좀 다른, 조금 더 퍼즐스러운 미궁을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스 보기에 아무것도 숨겨놓지 않고, 트릭을 찾는다고 바로 풀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노력을 해야 하는 그런 것들 말이죠.
결과물인 TRE1은 (적어도 제 생각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출시 후 7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도 질문글이 올라오고 힌트를 달라는 메일이 오는 걸 보면 썩 마음에 듭니다. 잘 만들어진 미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고, 실제로 TRE1을 풀다가 인생이 바뀐 분도 (진짜로) 계십니다. 창작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죠.
한편으로 TRE1은 지금 보면 노가다성이 짙은 문제가 굉장히 많은 편입니다. 사실 TRE1을 만들 때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노가다성이 짙은 문제가 나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요. 당시 기준에는 새로운 유형의 문제였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싫어하는 분들은 따로 말은 안 해도 이런 유형의 문제들을 꽤 싫어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7년이나 지난 지금은 미궁들의 퀄리티가 전체적으로 높아졌고, 플레이어들의 눈도 그만큼 높아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미궁게임을 즐기시는 분들은 노노그램(네모네모로직)은 좋아해도 백지 직소는 싫어하실 겁니다. 답이 아닌 것을 논리적으로 배제해 가며 풀 수 있느냐, 아니면 무작정 브루트포싱을 돌려야 답을 찾을 수 있는가의 차이입니다.
TRE2는 2017년에 나왔습니다. 간격은 4년이지만 실질 개발 기간은 1-2년 정도입니다. TRE2를 개발하면서 잡은 출제의 방향성은 '노가다 감소', 그리고 '출제 묘기'입니다. 노가다의 감소는 TRE1 출시 이후에 개발진들이 반성을 하고 줄여야 한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출제 묘기는, 글쎄요... 저는 플레이어들이 제가 낸 문제를 풀었을 때 문제를 교묘하게 잘 만들었음을 알아채고 감탄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문제의 아이디어를 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는 데 엄청난 시간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출제 묘기란 이를테면 같은 구성요소를 가지고 얼마나 더 똑똑하게 구현할 수 있냐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걸 대체 어케 만들었누!" 라는 감탄사가 나오게 하자는 거죠. 예를 들어, 스도쿠의 해를 유일하게 결정짓기 위해서는 최소 17개의 숫자가 제시되어야 함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17개의 숫자만 제시되어 있는 해가 유일한 스도쿠 문제를 출제할 수 있나요? 그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보통 출제 묘기에 성공한 문제는 아이디어를 낸 시간을 빼고, 실제로 그 문제가 성립할 수 있도록 구현하는 데만 다섯 시간 정도가 걸리더라고요.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단어를 찾느라 몇 시간 가량 사전을 뒤지거나,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수식을 만들어내느라 노트를 펴고 끄적이는 그런 과정들이죠. 물론 아이디어의 반 정도는 출제 묘기에 실패해서 버려집니다. ㅋㅋ.
미궁을 좀 해 보신 분들은 그런 느낌을 가끔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당장 TRE2 A1 문제부터, 출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실제로 그 아이디어를 만족하는 다섯 개의 작품을 찾아내는 건 자명하지 않죠. TRE1에 이런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TRE2에는 부쩍 늘어났습니다. 선물 미궁을 풀면서 B루트에 진입하신 분들이라면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겁니다. 그 문제가 실제로 성립할 수 있도록 구현해내는 게 쉽지는 않았거든요. 아니면, 이건 제가 만든 문제는 아닙니다만, 선물을 풀면서 "이 답은 제작자가 의도한 정답이 아닙니다" 라는 문구를 보셨다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실 겁니다.
아쉽게도 TRE2의 플레이 인원 수가 TRE1보다 현저히 적은 것 같습니다만, 아마 미궁 게임 자체가 인기가 낮아진 것도 있고, 시리즈가 있으면 1부터 도전하는 게 낫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TRE2는 TRE1의 단점들을 보강해서 만들어진 미궁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TRE2를 더 추천합니다만.
TRE1, TRE2 얘기를 했으니 TRE3 얘기를 해볼까요. 그동안 TRE3는 개발 예정이 있는지 질문이 많이 왔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준비 중이고, 아마 몇 개월 정도 차이는 나겠지만 지금부터 일 년 정도 더 걸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기서 제가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것은, 플레이어들이 선호하는 미궁 문제의 유형입니다. 제 미궁 문제에 대한 나름의 철학도 있고, 플레이어들의 피드백을 TRE3에도 반영하면 좋으니까 말이죠.
제가 고등학생 때 있었던 미궁 동아리에서는 만들어진 미궁 문제에 태그를 붙여 관리했는데, 그 태그 중에는 "전공 지식"도 있었습니다. 예, 대학교 수준의 전공 지식 말입니다. 그리고 아마 이런 미궁 문제는 타겟이 과고생 뭐 이런 집단이 아닌 이상에야 당연히 좋은 문제는 아닐 겁니다.
미궁 문제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가령 (1) 아이디어만 잡으면 노트를 펼 필요도 없이 1초만에 풀리는 문제도 있고, 위에서 말했듯 (2) 규칙은 거의 자명하지만 경우의 수가 너무나 많아 푸는 데 오래 걸리는 노가다성 문제도 있습니다. (3) 아이디어를 잡고 나면 퍼즐처럼 논리적 과정을 통해 경우의 수를 줄여 나가는 문제도 있습니다. (4)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그 문제 자체가 지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5) 특정한 배경지식이 필요해서, 배경지식이 없으면 풀기가 거의 불가능한 문제도 있고요. (6) 검색을 요하되 딱히 특정 배경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7) 그림판, 포토샵 등 이미지 편집 툴을 요하거나 그림을 그려야 하는 문제도 있고, (8) 문제가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들 외에도 수많은 문제 유형이 있을 겁니다. 원래 이런 건 100% 분류가 불가능한 법이죠.
이 중 몇 가지 유형에 대한 제 생각을 먼저 밝히고 싶습니다.
(1) 아이디어만 잡으면 바로 풀리는 문제 - 풀어낸 플레이어들이 매우 선호하는 유형인 동시에, 못 풀어냈거나 오래 막혀 있던 플레이어들은 매우 싫어하는 유형입니다. 갈피를 잘못 잡고 헤매기 시작한다면 밑도끝도 없이 헤매기 쉬워 힌트를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2) 노가다성 문제 - 플레이어들이 가장 싫어하는 유형인 것 같습니다. 줄여 나가야 한다고 보지만... TRE 시리즈의 경우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TRE는 고난이도를 표방하고 있고, 애초에 후반부에 가면 노트와 펜 없이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것 같습니다.
(5) 특정 배경지식이 필요한 문제 - TRE3 문제들을 개발하면서 가장 주의를 기울여 피하려고 하는 유형입니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이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배경지식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기 때문에 의미없이 시간만 날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가 상식이고 어느 정도가 너무 특정한 배경지식인지 선이 굉장히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출제자 입장에서 가장 주의해야 될 유형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모스부호나 점자 같은 것들은 미궁계에는 너무 많이 쓰여서 상식이나 다름없었지만 이제는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6) 검색을 요하는 문제 - 이런 유형을 플레이어들이 선호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조금 줄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8)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문제 - 이런 문제를 출제할 때는 플레이어가 각 단계를 넘어갈 때마다 자신이 방금 한 행동이 확실히 제대로 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금 한 행동이 틀렸다고 착각하고 전 단계로 돌아가서 영원히 헤매는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잘 구성되기만 한다면, 플레이어들이 가장 높게 평가하는 문제가 되더라고요.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문제에 대한 칭찬을 지금까지 많이 목격했습니다.
이외에도 제작자 입장에서 문제를 만들면서 신경을 쓰는 점들에는, 플레이어가 풀이 과정의 중요한 단서를 쉽게 떠올릴 수 있도록 문제 이미지를 현명하게 디자인해 준다거나, 논리적 비약이 없고 풀이 과정의 스텝 하나하나에 대응되는 단서가 다 제시되어 있도록 개연성을 확보한다거나, 쓸데없는 디테일을 뺀다거나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뭐 이거 말고도 문제를 출제하는 입장에서는 신경써야 할게 상당히 더 있기는 한데... 이 글은 미궁 제작자들 보고 읽으라고 쓰는 글이 아니니 이만 줄입니다. 제작자들을 타겟으로 한 글은 '미궁에 대하여'에 하나 써 놨으니 그쪽을 참고하시길 바라요.
여기까지 흥미롭게 읽어주셨으면 좋겠네요. 제가 여러분께 묻고 싶은 점은 이겁니다. 플레이어 입장에서, 어떤 문제를 좋은 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반대로 어떤 문제를 나쁜 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위에 제시한 8가지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를 얘기하셔도 좋으니 어떤 유형을 선호하고, 어떤 유형을 싫어하시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좋은 문제라면 이런 건 없어야 한다" 도 아주 좋습니다. 제 생각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의견도 좋습니다.
"Aha-moment"가 큰 문제를 보고 싶으신가요? "어케 만들었누"를 외치고 싶으신가요? 노노그램(네모네모로직)처럼 논리적으로 긴 추론을 요하는 문제를 풀고 싶으신가요? 여러분이 어떤 문제를 좋아하는지 궁금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충명 드림.